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-노르웨이 왕국 (문단 편집) ===== 스웨덴의 2차 공격과 덴마크의 반격 ===== 비록 프레데리크 3세는 스웨덴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굴욕을 감내했으나 칼 10세 구스타브는 이번 기회에 아예 덴마크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AD 1658년 6월 로스킬레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덴마크를 전격적으로 재침공하여 코펜하겐을 다시 포위했다. 여전히 유틀란트 반도와 퓐 섬을 스웨덴군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3세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. 그러나 프레데리크 3세는 코펜하겐 시장 한스 난센을 중심으로 뭉친 시민들의 결사적인 항거 덕분에 성문을 닫고 굳건히 버텨낼 수 있었다. 그 사이 덴마크를 지원 온 네덜란드 함대가 10월 29일 외레순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바다를 통한 보급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AD 1659년 2월 22일 스웨덴군을 최종적으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. 이제 덴마크가 반격에 나서서 반(反) 스웨덴 동맹인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]]-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|브란덴부르크]]-폴란드 동맹군의 지원을 받아 유틀란트 반도를 탈환했다. 그 밖에도 스코네, 블레킹에, 할란드에서 '스나프하네(snapphane)'라고 불리는 봉기군이 일어나 스웨덴군을 몰아냈고 노르웨이군도 트론헤임을 탈환했으며 보른홀름 섬에서도 주민 봉기가 일어나 지배권을 되찾았다. 또한 프레데리크 3세는 스웨덴의 편으로 돌아섰던 동명의 홀슈타인-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3세를 공격하여 퇴닝을 포위했고 AD 1659년 8월 그가 사망하면서 18살에 불과한 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가 홀슈타인-고토르프 공국을 계승했다. 마지막으로 AD 1659년 11월 14일 뉘보르 전투(Battle of Nyborg)에서 네덜란드 해군 및 폴란드 육군의 도움을 받은 덴마크 해군과 육군이 스웨덴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프레데리크 3세는 퓐 섬도 되찾을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